고진석 형! 삼가 형의 명복을 빕니다.

작년에 형이 돌연 입원을 : 했을 때만해도 형이 병원 문을 나서지 못하고 이렇게 떠나실 줄은 상상도 못했소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 아쉬운 일입니다.

돌이켜 보건대 형과 : 내가 처음으로 의미 있는 인연을 쌓은 건 광주 보병학교 시절 교관근무 때였던 것 같아요. 어느 일요일 : 형의 초대를 받고 몇몇 동기생들이 담양으로 버스를 타고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어부인이신 김광자 : 여사께서 약국을 하고 있었어요. 그날 우리는 푸짐한 저녁을 대접받고 돌아왔습니다.

형은 이미 그 때부터 : 남에게 베푸는 일에 길들여 졌던 모양입니다. 그런 대접을 받고도보답을 한 기억이 나지 않으니 나는 좀 : 뻔뻔했던 것 같아요.

우리는 군대생활을 하는 : 동안에는 모두가 군무에 바쁜지라 자주 만나지 못했지요.

우리는 예편을 하고 : 나서야 비로소 서울에서 함께 하는 긴 여정에 나섰던 것입니다.

형은 작은 체구이지만 : 얼마나 뚝심 있고 당당합니까? 형과 잠시라도 함께 해본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형을 칭송할 것입니다.

나는 형을 더 많이 : 알아 갔어요. 형은 치밀했지요.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궤 : 뚫어 보는 능력이 남 달랐지요. 유머와 반어법을 즐기며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를 좋아하는 성품이었지요. 형과 나는 서로 의기 투합했어요.

형은 다른 사람들이 :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거나 재치 있는 행동을 할 때마다 형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소.

동기회생들이 단체 여행을 : 할 때 형은 동기생들을 물심 양면으로 지원해 주었어요. 그토록 동기생들을 아껴 준 형에게 나는 너무 : 감격했지요.

어느 날 나는 형의 : 사무실 한 쪽 벽에 있는 길다란 서가에 책이 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형의 서제를 보고 : 나는 책을 내다 버렸던 걸 후회해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지요.

나는 그 동안 조금씩 : 모았던 책이나마 이제 늙었다며 다 내다 버렸습니다. 나는 비로소 책만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형에게서 : 배운 것입니다.

형은 다독가였습니다. 형은 끊임 없이 수양을 쌓아가고 자신의 내면을 키워나가는 성실한 분이었소, 알고 : 보니 형은 글을 짧게 쓰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형에게 들려주고 싶어 : 형이 쓴 글 중에서 몇 가지 추려 봤어요. 형의 글 중에는 <욕망 : 때문에 낸 화>라는 글이 있었어요. 형은 자신이 화를 : 낸걸 자책하고 있었지요.

형은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형도 역시 인생을 살아가며 마음 속으로는 누구나 맞닥뜨리는 일들과 싸웠던 때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형이 열거한 욕망에는 의식주, 위상 찾기, 권위, 관계, 주도권, 승리, 상석 : 등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 자신이 꼭 그랬다기 보다는 욕망을 비우고 스트레스를 줄이고, 보다 더 행복한 삶을 추구하겠다는 형의 결의였고, 자신을 반성하는 : 밑거름으로 사용한 것이었지요.

형은<우정>이라는 글에서 우정을 나무에 비교했어요. 비가 오나 눈이오나 : 자리를 지키는 나무, 철 따라 옷을 갈아입고, 바람에 흔들리기는 : 하지만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무, 세월 따라 자라는 나무, 가꿔 : 줘야 하는 나무, 생명력이 있는 나무, 형은 우정도 그래야 : 한다고 했지요.

우정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사랑, 이해, 용서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우정의 생명력을 앗아 가는 것은 시기, 질투, 오해라고 했습니다.

형은 우정은 믿음, 사랑, 겸손, 배려와 넉넉함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며 스스로 친구들과 이런 : 우정을 쌓아 간 분이요. 형은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 분이요.

형은<여자는 : 공과 같다>

형은 글이 남들에게 부담이나 딱딱하게 여겨질 지 모른다며, 그 대신 부담 없이 넘길 수 있는 실없는 말로 대체한다며 이런 말도 했어요. :

20대는 : 럭비공과 같다. 여러 사람과 같이 놀기 때문이다.

30대는 : 농구공과 같다. 제한된 몇 사람과만 놀기 때문이다.

40대는 : 탁구공과 같다. 서로 튀기기만 하기 때문이다.

50대는 : 골프공과 같다. 하나만 가지고 놀기 때문이다.

60대는 : 볼링볼과 같다. 사용하면 버리기 때문이다. (2005.06.13 청야)

버스로 동기생 여행을 : 할 때면 형은 결코 앞 자리를 사양했지요. 형은 맨 뒷자리에 앉지 않으면, 마지 못해 세 번 째 혼자 앉는 자리를 좋아했지요.

나는 그것은 형이 은연 : 중 자신만의 공간을 즐기는 마음이라고 말해 줬지요. 사람은 1m정도의 : 개인 공간이 필요하며 상대에 따라 더 가까이 근접해 오는 것을 허락 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그건 바로’공간’이라는 책에 있는 글을 인용해서 형의 마음을 짚어 본 것이었습니다. 형은 그 때 그 책을 읽고 있었지요. 형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 알아채고 내게 빙긋이 웃어주며 신호를 보내 주었지요. 나는 그렇게 형과의 교감을 즐겼습니다.

형은 절약과 공정성을 : 좋아했지요. 형은 다른 사람들이 자칫 놓치기 쉬운 작은 것에도 큰 관심을 가졌지요.

형은 세상의 유명인사들이 : 하듯이 평소 검소하게 살아가면서도 공익을 위해서, 친구들을 위해서 기꺼이 베풀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지요.

형은 호, 불호가 분명했지요. 형은 주인이면서도 때로는 나그네이고 싶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형은 한편으로는 마음이 그지 없이 여린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 단호한 사람이었지요.

형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면 서슴없이 그 자리에 섰지만, 그렇지 않다고 판단 되면 결코 허세를 부리지 않았지요. 형은 늘 : 대범했지요.

나는 형과의 사이에 할 말이 많아요. 형은 드물게 보는 철학자이고, 글 쟁이고, 유머 있고, 반어법을 잘 쓰는 재치 있는 사람이었지요. 얼마나 시치미를 뚝 뗀 채 천연덕스럽게 말을 잘하는지 나는 이따금 진짜인지 알고 깜빡 속기도 했지요. 

형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사람이었지요. 어떤 면에서는 깐깐하고, 까다롭기도 했지요. 그러면서도 자상하고 세밀한 사람, 한 마디로 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형은 특히 관찰력이 : 뛰어난 사람이었지요. 형은 매사를 범사로 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 글이 나오고, 유머가 나오고, 반어법이 나오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형은 어디에다가 그 많은 것들을 담아 두었는지, 끝도 없이 재기를 발하고, 유머를 쏟아내고, 한없이 재미 있는 사람이었어요. 다른 사람을 아낌없이 칭찬 할 줄 : 알고,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면서도 항상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이었지요. 자신은 검소하게 살아가면서도 남을 돕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지요. 형은 : 아무도 모르게 어려운 동기생들을 많이 도와 줬지요. 형에 대한 이런 말들은 밤이 새도록 해도 못다 할 : 것입니다.

형은 말했지요. 하루는 : 해가 뜨면서 시작하고 해가 지면서 끝난다. 한해는 정월 초하루의 해가 뜨면서 시작되고 섣달 그믐 해가 : 지면서 끝난다. 사람의 그림자의 길이가 가장 길 때는 해가 뜰 때와 해가 질 때다. 해가 뜰 때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미래의 꿈과 희망의 크기이며 해가 질 때의 긴 그림자는 성숙한 인간이 남긴 : 인생의 발자취라 한다.

형은 2007년에는 <두 개의 그림자>라는 글에서 이런 말도 했어요. 아무리 : 나이가 들었다 해도 예뻐지고 싶은 소박한 꿈과 희망을 가져 본다. 그것은 늙음이 남에게 혐오감을 주지 : 않기 위해서다.

형은 오드리 헵번이 자기 아들에게 남긴 말을 되새겨보았지요. “매혹적인 입술을 가지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예쁜 눈을 가지려면 : 상대의 좋은 점을 보라. 늘씬한 몸매를 갖고 싶거든 너의 양식을 배고픈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

그렇게 해서 해 뜰 때의 그림자와 해질 때의 그림자가 다 : 같이 길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형의 마음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 알 : 것 같아 한 없이 숙연해 지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청야! 형은 저 푸르른 들판을 생각하지 않았겠소? 그곳에서 마음껏 뛰어다니며 : 상상의 나래를 펴고,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한 마리의 호랑이처럼, 사자처럼, 들 소처럼 웅대한 꿈을 꾸지 않았겠소?

이제 자신을 늘 닦고 가꿔오며, 동시에 남들의 행복을 빌어준 이 위대한 한 인간이 여기 누워 영원한 안식을 취할 것입니다. 형이 좀 더 우리 곁에 있기를 바랐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욕심이었을까요? 나는 이제 더 이상 형의 아름다운 향기를 맡을 수 없고, 형의 당당한 : 모습을 볼 수 없고 형의 유머를 들을 수 없는 것입니까?

작년에 입원 소식을 듣고 달려 간 나를 향해 형은 내 손을 : 꼭 잡아주며, ‘알았어! 퇴원해서 만나자!’ 하고 굳은 약속을 해 주지 않았소? 그랬던 천하의 고진석이 어떻게 : 이렇게 병원 문을 나서 보지도 못한 채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 버리다니 너무 안타깝소. 믿을 수가 없소.

아, 그러나 이제 : 시간이 되었소. 나는 형의 손을 놓아 주어야 할 시간이 다가 온 것 같소!

형! 이승의 일일랑 : 다 내려 놓으시고 이제 편히 쉬시오. 형의 명복을 빕니다. 2018.07.07 : 이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