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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생/가족방

  양재일
  故 景峰 金秉圭兄을 追慕합니다
  

              故 景峰 金秉圭兄을 追慕합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열혈남아 경봉 김병규는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갔습니다.

 병규는 일제시대 일본에서 교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거기서 유년기를 보내고 해방 후 귀국하여 외가가 있는 충남 공주와 전남 순천에 거주하였고 고학을 하면서 순천공고를 졸업 육사에 진학하였습니다.

 일본어 발음이 셖여 '전망대"를 "존망대"라 할 만큼 발음이 어눌하였지만 건장한 체격에 수려한 용모로 육사 기수단원의 일원이 되었고 졸업후에는 모두의 선망인  육군의 의장대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나와는 65년 파월당시 맹호 기갑연대 소총중대장으로 파월하였고 또한 보병 20사단에서 보병대대장으로 함께 근무하였으며 그후 병규는 보병32사단에서 연대장을 서울에서는 지단장을 역임했으며 전역후에는 성남과 수원에서 예비군을 관장하면서 서로 깊이 사귀면서 친숙하게 되었습니다.

 슬하에는 설하,설희,선희 동훈등 3녀 1남을 두어 딸들은 출가시켜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 특히 24살 꽃같은 나이에 34살 노총각 신세를 면하게 해 주었지만 금혼식을 불과 1년여 앞두고 애석하게도 부군을 잃은 이인숙 여사는 고생끝이었지만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참으로 거룩해 보였습니다.

 사실 병규는 공수부대에서 근무도 했지만 매사 죽자 사자식으로 매달리는 성품이 아니고 누구와도 다투지 않고  선비처럼 신선처럼 인생을 즐기면서 건실하게 낙천적으로 살았습니다. 특히 마지막 공직이었던 고속도로 관리공단 부사장으로 재직할 때는 가끔 동기생들을 이천으로 불러 설봉산 등산도 함께하고  목욕도 같이 하면서 늘 베푸는 성격이었습니다. 이렇게 생활하는 데는 아내의 공이 컸습니다. 자녀들이나 집안일에 남편이 속 썩일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인숙 여사는 가사 뿐만아니라 동기생 부인회 총무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주변의 신망을 쌓아왔습니다. 장모님은 6,25때 일찍이 홀 몸이되어 무남독녀 하나를 온갖 고생을 하면서 키워 결혼을 시켰는데 통상의 청상과수가 그렇듯이 딸에게서 모든 보상을 받으려니 했지만 인숙씨가 나빠서가 아니라 결혼하면 여자는 자식과 남편에게 올인 하기 마련, 그게 섭섭하셔서 나에게 하소연도 하셨을 만큼 나에게도 잘해 주셨는데...

 그 때도 강남 성모병원이었던거 같은데  같이 간 동기생과 분향을 하는데 옆의 동기생이 귀속 말로 "우리 묵념만 하자"라는 말을 귀도 어두운 병규가 알아 듣고 "야 임마 너는 절 해"라고 툭 치던 손길이 못내 정답게만 느껴 집니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랄 만큼 장부처럼 사시다 가셨습니다. 내 어머님 돌아 가셨을 때는 불편한 몸에도 병규 내외가  송추 장지까지 참여하였고 그런데 살아생전 병규를 본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아픈줄은 알았지만 귀가 불편하단 정도였고 굳이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성미라 그러려니 했던것이 일이 이리 크게 번지리라 상상도 못했습니다.

 7년 동안이나 못 본 친구라 얼굴이나 보고  잘 못을 사과하려고 가족이 주관하는 입관에 같이 입회했습니다. 병마에 시달리면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  그 좋던 풍채는 어디로 가고 여윈 얼굴에 초췌한 모습이 하두 안쓰러워 차마 보기가 딱했습니다.

 부디 저 하늘 나라에서는 아프지말고  입관 할 때 내 한 말 다시 반복 할께 "병규야, 가서 잘 있어,우리 곧 따라 갈께"

 

                       翰碩 梁在一 拜   

[인쇄하기] 2019-09-02 20: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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