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시죽 

   요즘, 내 생애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할 일은 언제까지 어떤 일로 특정 짓치 않아 시간에 자유로워 오늘 못하면 내일하고 내일 못하면 모레 한다는 느긋한 심정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시간이 무한대로 남는 건 아니어서 때로는 조급해지기도 한다. 대우 김우중 회장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바쁘게 세계를 누비며 기업활동을 했는데, 지금 나는 <할 일은 없고, 시간은 많다>로 요약해야 할까?

   젊었을 때는 직장업무에 얽매이고 취미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생각은 엄두도 못 냈는데, 지금은 그 때에 비하면 할 일을 결정하고 시간 배분도 비교적 여유롭다. 단지 주요관심이 가는 것은 하나를 해도 새롭고 유익한 일을 하고 싶다. 이는 살아오면서 숙제로 미뤘던 관심사나 미결사항의 연구 결말 등이다.

   8,90년을 사는 사람은 모두 같은 기간을 선물 받았는데, 이 기간동안 무엇을 하며 보내고 어떤 결과물을 얻는지에 따라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그래서 결과물의 질과 양에 따라 그 진가가 결정되고 그 생애의 가치가 결정된다.

   ①누구는 하는 일 없이 시간만 소비하며, 한 일이 없어 쓰레기로 가득한 큰 보자기를 내놓는 경우도 있을 거고, ②보자기는 작으나 많은 사람의 병을 낫게 하는 귀한 보석과 이웃사랑으로 가득 쌓여 가격을 가늠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으며, ③평범하지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음식과 의복 주거에 필요한 사항을 발전시키는 창조물을 개발한 상품으로 가득채워 인류의 풍요로운 생활에 기여하는 경우도 있겠다. ④또 혼자만 먹고 마시며 즐겨서 세상자원을 낭비하고 젊은이에게 좋지 않은 생활선례(先例)를 보여 해독만 끼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부류의 사람이 되어야 할까? 이제 남은 시간은 얼마가 될지 모르나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지나온 삶의 반(80/2=40년, 80+40=120)도 안 될 거란 사실이다. 일은 끝이 좋아야 한다는데, 이제 마무리를 잘해야 하지 않을까? ①가식의 탈을 벗고 좁게는 아내 자식 손주들에게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 가장(家長)으로, ②이웃과 지인들에게 떳떳하고 배려 깊었던 친구(親舊)로, ③그리고 끝까지 올곧게 살려고 노력한 노선(老仙)으로 마감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았다고 스스로 자족하고 주위에서 인정해 주면 그것으로 만족하리라.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던 남은 생애를 바쳐 다할 각오다.

   이렇게 생각하니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촉박(促迫)한 거 같다. 그래서 너무 급하다고 제지를 받았던 조급증(躁急症)이 도지는 느낌이다. 무슨 일이던 일찍 시작하여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일을 해야 제대로 되고, 혹시 잘못되어도 다시 하여 바로잡을 수 있어 여유로운 처리를 좋아한다. 그러니 30분전이나 1시간 전부터 대기하기 일쑤이고, 다른 사람은 출근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출근하여 실무자보다 앞서 일을 확인하는 습성은 버리려고 해도 버리지 못하는 단점이다. 이를 잘 알고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痼疾病)으로 굳어졌다.

   시간이 많은 요즘, 하는 일 중에 비중이 가장 큰 것은 컴퓨터놀이이다. 그렇다고 보고(寶庫)인 컴을 이용한 갖가지 기능을 활용하는 건 아니다. 컴은 95년에, 현대에 근무하는 큰 딸이 현대펜티엄컴을 사주어 현대교육장에서 교육을 받고, 워드와 인터넷을 시작한지가 벌써25년이 되었다. 그동안 컴을 이용한 결과물도 많이 생산하여 수필집 6권, 종사연구서 5권 등 10여권의 역작(力作)을 냈고, 앞으로 5년 내에 지금까지 하던 일을 정리하여 몇 권을 더 추가할 계획이다. 글을 쓰며 갖는 갈등은 나는 목적을 가지고 글을 써서 독자인 아들 딸과 손자 손녀가 한 가지 교훈이라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거나 읽지 않는다면 쓸 데 없는 쓰레기로 쌓일 것을 걱정한다.

   그래서 내가 쓰는 수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한다. 흔히 수필은 부담 없이 <붓가는 대로 쓴다>거나 <청화백자>라고 선배들이 정의했는데 이는 잘못된 정의라 생각한다. 술에 취해 쓴 낙서쯤으로 생각하거나 분명한 개념이 없이 막연하게 과장하니 수필이 아직 문학의 한 장르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한다. 글은 길던 짧던 사물을 관찰하고 흡수하여 영양으로 삼아 자기의 생각과 감성이 배인 진실된 글을 써야 한다. 그래서 필자의 정신이 배인 글이 창작되어야 하는데 이 정신이 부족해 홀대를 받는 게 아닌가 한다. 깊이 있는 사색과 자기화한 글이 일종의 산고(産苦)인데 이를 거치지 않고 낙서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쓰는 글은 수필이 아니다.

   앞으로 나름대로 정의한 수필을 쓰고 싶다. 그것이 비난을 받을지라도,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사실을 기초하여 내것으로 만들어 거기에서 누에가 고치실을 뽑듯 솔직한 심경을 글로 표현하고 싶다. 이게 수필을 쓰는 진정한 목표와 자세가 아닐까?

   나는 재미없는 사람이다. 재치(유모어)가 부족하고, 술‧ 담배‧ 잡기를 못하니 친구들과 어울려 진지한 대화도 오랫동안 나누지 못한다. 그래서 컴과 논다. 컴은 늦게까지 붙들고 있다고 짜증내거나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간식이나 커피 술을 대접하지 않아도 섭섭해 하거나 무엇을 기대하지도 않고, 필요할 때 사용할 복사지나 잉크를 끼워 주면 되니 비용도 경제적이다. 그러면서 일을 마치고 수고했다고 컴을 끄고 같이 쉬는 것만으로도 보상이 충분하다. 그래서 할 일 없이 지루할 때, 이해심이 넓고 일을 잘 해주는 컴과 지루한 시간 죽이기에 함께 하는 게 가장 재미있다. 지시죽에 이보다 더 좋은 친구와 놀이가 있겠는가? (2020.1.20.) 東巖

*지시죽은 지루한 시간 죽이기에서 한자씩 따온 약어임